리디 대여로 읽은 책;
동의보감으로 바라보는 현대인의 삶과 몸에 대한 일일연재 글 모음집.
처음엔 동의보감을 소재로 하였기에 한의사인줄 알았으나 알고보니 고전평론가 프리랜서 강연가 집필가 그리고 공동체 삶 참여자 이시다. 군데군데 꼰대 느낌이 있지만 난 이제 청년기를 지났으므로 그다지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.
귀찮아서 스크린샷으로 때우려다 이렇게라도 한번 더 되뇌어 보고자 발췌;;;
-생명이 원하는 건 오직 순환과 운동뿐이다.
-결국 성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우월감이다. 타인과의 교감이 아니라 인정욕망이다. 전자는 충만감을 생산하지만, 후자는 결핍을 생산한다.
-건강이란 근원적으로 몸과 외부 사이의 '활발발(活潑潑)'한 소통을 의미한다. 소통하지 않는 삶은 그 자체로 병이다. 그래서 몸에 대한 탐구는 당연히 이웃과 사회, 혹은 자연과 우주에 대한 탐구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.
-사랑이 삶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, 삶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사랑을 구현하는 것이다.
-지성이란 자신을 둘러싼 시공간적 배치, 그리고 존재의 좌표를 읽어 내는 명철함이다.
-사랑이란 타인의 욕망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. 홀로 설 수 있는 자만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.
-몸을 쓰면 마음이 쉬고, 몸을 쓰지 않으면 마음이 바쁘다.
-자유와 행복이 없다면 문명과 제도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. 존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면 물질적 풍요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.
-더 중요한 건 '관계'다. 주고받는 말, 함께하는 행동, 어제와 다른 사고방식, 이 삼박자의 리듬이 있어야 '정.기.신'이 살아 움직인다.
-정치란 단지 물질을 분해하는 시스템이 아니라, 관계의 능동적 흐름을 창안하는 활동이다.
-직업이란 단지 경제활동일 뿐 아니라, 생명의 정기를 사회적으로 표현하고 순환하는 행위이다. 따라서 단순히 돈과 지위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가치들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.
-프리랜서는 말 그대로 '길 위의 인생'이다. 어떠한 조직과 지위 보장도 없지만 그렇기에 매 순간 자신의 삶을 '있는 그대로' 표현할 수 있다.
-근대 이전, 귀족들은 주로 칠정상(七情傷)을, 평민들은 노곤상(勞困傷)을 많이 앓았다. "귀한 사람은 겉모습이 즐거워 보여도 마음은 힘이 들고, 천한 사람은 마음이 한가해도 겉모습은 힘들어 보인다."(동의보감)
-요컨대, 몸과 공간, 사람과 사람, 그 '사이'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, 이것이 곧 '브리콜라주의 경제학'이자 백수들의 '야생적' 생존법이다.
-'브리콜라주'란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인디언의 기술을 뜻한다.
-부처가 되는 건 이적이나 설법이 아니라 얼마큼 '소유로부터 자유로운가'에 달려 있다.
-우주적 리듬에는 좋고 나쁜 것이 없다. 다만 끊임없이 변해 갈 뿐이다. 누구도 이 변화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. 그래서 계속 좋은 운도, 계속 나쁜 운도 없는 법이다. 대운 역시 오행의 스텝을 밟아 가기 때문이다. 중요한 건 그 변화의 리듬을 능동적으로 탈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을 뿐이다. 대운이란 이 '무상성'의 이치를 깨우쳐 주는 명리학적 키워드다.
-운명의 주인이 된다는 건 존재와 세계에 대한 해석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.
-'임꺽정'의 테마는 '길과 청춘, 그리고 에로스'다.
-헌데, 칠정을 동요시키는 건 무엇보다 타자들과의 관계다. 고로, 타자들과의 어울림과 맞섬, 그것을 조율하는 것이 양생술의 핵심이다.
-변방의 프리랜서 연암, 세계제국의 지존 건륭황제, 그리고 천하의 요새지이자 두뇌였던 열하 - 이 세가지 기호와 운명적 마주침. 그것이 바로 '열하일기'다.
-모든 길은 '사이'다.
-인간에 대하여, 또 혁명에 대하여 던지는 결코 끝나지 않는 질문들, 그것이 '아Q정전'의 진수가 아닐는지.
-'좋은 것은 끝나기 마련이고, 끝이 있어야 좋은 것이다.' 홍루몽을 읽고 나면 오래도록 여운에 남는 구절이다. 부귀영화의 덧없음과 삶의 무상감을 이보다 더 간결하게 말해 주는 구절이 또 있을까.
-삶의 무상성과 구도적 열정이 전체 스토리를 감싸고 있는 셈이다. 작가는 정이 사무치면 무상의 진리를 터득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?
-구법의 비전은 저 멀리 서역에 있지 않다. 탐.진.치와 108번뇌는 내 '마음'에 있다. 그리고 그것이 발현되는 현장은 어디까지나 일상이다. 하여, 구법과 모험, 일상과 진리는 분리되지 않는다. 깨달음은 그 둘이 마주치는 '경계'에서 오는 것이다. 그 유쾌한 환타지가 '서유기'의 세계다.
-원본과 복사본, 작품의 안과 밖, 주체와 객체 등의 경계가 여지없이 뒤흔들리는. '돈키호테'가 시공을 넘어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는 원천도 여기에 있으리라.